맨위로가기

레날트 스코글룬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1950년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뛰어난 볼 컨트롤과 왼발 기술을 바탕으로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1943년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하마르뷔 IF, AIK,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인테르에서 세리에 A 두 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스웨덴 대표팀으로 1950년 FIFA 월드컵 3위, 1958년 FIFA 월드컵 준우승을 달성했으며, 1958년 월드컵에서 유일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스웨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웨덴 FIFA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 쿠르트 함린
    쿠르트 함린은 오른쪽 윙어 포지션에서 활약한 스웨덴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유벤투스, 파도바, 피오렌티나 등 이탈리아 클럽에서 뛰었으며, 스웨덴 국가대표로 1958년 FIFA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고, 2024년에 사망했다.
  • 스웨덴 FIFA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 프레드리크 스텐만
    프레드리크 스텐만은 스웨덴의 축구 선수로, 베스테라스 SK에서 데뷔하여 IF 엘프스보리, 유르고르덴 IF를 거쳐 알스벤스칸과 스벤스카 쿠펜 우승을 기록하고, 이후 해외 리그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했다.
  • 1958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 - 존 찰스
    존 찰스는 웨일스 출신의 다재다능한 축구 선수로,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잉글랜드 1부 리그 득점왕,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득점왕 및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으며, 웨일스 국가대표로 1958년 FIFA 월드컵 8강 진출에 기여했고, '선량한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1958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 - 쿠르트 함린
    쿠르트 함린은 오른쪽 윙어 포지션에서 활약한 스웨덴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유벤투스, 파도바, 피오렌티나 등 이탈리아 클럽에서 뛰었으며, 스웨덴 국가대표로 1958년 FIFA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고, 2024년에 사망했다.
  • 함마르뷔 IF의 축구 선수 - 안테 코비치
    안테 코비치는 호주 출신의 은퇴한 골키퍼로, 다양한 클럽에서 활약하며 2006년 호주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고, PAOK, 뉴캐슬 제츠,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에서 우승을 경험했으며, 2014년 AFC 챔피언스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 함마르뷔 IF의 축구 선수 - 조셉 아이두
    조셉 아이두는 가나 출신의 축구 선수로, 가나, 스웨덴, 벨기에, 스페인 리그를 거치며 KRC 헹크 소속으로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 A 우승을 경험하고 UEFA 유로파리그에서 활약했으며 가나 국가대표팀으로도 활동했다.
레날트 스코글룬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5년의 스코글룬드
본명칼 레날트 스코글룬드
출생일1929년 12월 24일
출생지스톡홀름, 스웨덴
사망일1975년 7월 8일 (45세)
사망지스톡홀름, 스웨덴
170cm
포지션왼쪽 윙
유소년 클럽
유소년 클럽 연도1943–1944
1944
1944–1946
유소년 클럽IK 스테르난
스포르트-함
하마르뷔 IF
클럽 경력
클럽 연도1946–1949
1949–1950
1950–1959
1959–1962
1962–1963
1964–1967
1968
클럽하마르뷔 IF
AIK
인테르 밀란
삼프도리아
팔레르모
하마르뷔 IF
셰르토르프 IK
출장수449
득점수100
클럽 출장수57
5
241
78
6
56
6
클럽 득점수21
0
55
15
0
7
2
국가대표팀 경력
국가대표팀 연도1950–1964
국가대표팀스웨덴
국가대표팀 출장수11
국가대표팀 득점수1
수상 내역
FIFA 월드컵3위 1950년 브라질
준우승 1958년 스웨덴

2. 선수 경력

그의 별명 "나카"는 그의 형이 나카 FF에서 뛰었기 때문에 붙어진 별명이다.[32] 스코글룬드는 50년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역사에 있어서 스타였다. 그가 처음 출전한 1950년 FIFA 월드컵에선 인사이드 레프트 포지션으로 출전했고, 8년 뒤에 조국에서 열린 1958년 FIFA 월드컵에선 왼쪽 윙으로 활약했다. 그는 1943년 IF 흐라흐난에서 그의 축구 경력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클럽인 하마르뷔 IF으로 옮겼다. 그는 1944년부터 1949년까지 5년간 활약한 후[32] 스코글룬드는 클럽의 재정상의 문제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AIK 폿볼로 이적하게 된다. 곧 그는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고 강력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는 대표팀 동료인 카를 에릭 팔메르와의 뛰어난 호흡으로 스웨덴을 3위로 올려놓게 된다. 또한 이 활약으로 그의 금발머리와 뛰는 모습에서 스코글룬드는 "흔들리는 옥수수대"(The swaying corn-cob)란 별명을 얻게 된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브라질의 상파울루 FC에서 $10,000에 계약 제의가 들어왔으나 스웨덴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지켜본 AIK는 너무 적은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스코글룬드는 이 값의 5배의 가격으로 이탈리아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였다. 인테르에서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53년과 1954년 세리에 A 리그 우승을 하게 된다. 스코글룬드는 인테르에서 246경기 57골을 기록했다.

그의 뛰어난 볼 컨트롤과 왼발 기술, 볼 배급은 스코글룬드가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게 하였다. 다음 번 월드컵에서 스웨덴은 그를 부르지 않았고, 결국 1954년에는 스웨덴 팀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적은 수의 A매치에만 출전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자 입장을 바꿔 스코글룬드를 다시 뽑았고 스웨덴은 브라질에 이어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전 대회 우승팀인 서독과의 4강전에서 그의 A매치 유일한 골을 넣었고 스웨덴은 서독을 3-1로 이겼다.

그는 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고 그의 이적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진정한 엔터테이너였다. 그의 수비수 다리 사이로 공을 차서 다시 빼내는 기술과 발뒤꿈치를 이용한 볼 컨트롤, 현란한 몸을 도는 동작은 상대 수비수들이 틀린 방향으로 이동하게끔 하였다.

UC 삼프도리아와 US 팔레르모에서도 뛰면서 이탈리아에서 13년간 활약한 후 1964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고향인 스톡홀름의 서데어말름의 하마르뷔 IF에서 3년간 다시 뛰게 된다.

2. 1. 초기 경력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192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스톡홀름의 외스테르말름에 있는 알레만나 BB에서 태어났지만, 쇠데르말름 지역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자랐다.[2] 어린 시절 밴디, 아이스하키, 핸드볼 등 다양한 스포츠에 재능을 보였으며, IK 셰타에서 스웨덴 최고 등급 핸드볼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4][5]

그의 축구 경력은 1943년 지역 클럽 BK 스체르난에서 시작되었다.[3] 클럽이 해산된 직후, 1944년 스코글룬드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클럽인 하마르비 IF로 이적했다.[3] 14세에 이미 청소년 팀에서 "쇠데르말름에서 우리가 본 적 없는 가장 빠른 발을 가진 트릭스터"라는 평가를 받았다.[6]

1946년 6월 5일, 스코글룬드는 함마르비 소속으로 핀란드 클럽 수데트와의 친선 경기에서 시니어 데뷔전을 치렀다.[7] 16세의 나이로, 그는 그 시즌에 11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했다.[6] 1947년 봄, 데게르포르스 IF와의 친선 경기에서 스웨덴 국가대표인 올레 오룬드를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21]

이 시기에 스코글룬드는 "나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의 형 조르그 "요예" 스코글룬드가 나카 FF를 대표했기 때문이라는 설[8]과 그의 아버지가 해당 지역에서 정원사로 일했기 때문이라는 설[9]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스코글룬드는 1949년 10월 19일 베스테로스 SK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함마르비를 떠났다.[21] 그는 함마르비에서 4시즌 동안 하위 리그에서 57경기에 출전했다.[6]

2. 2. AIK

1949년 10월,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하마르뷔 IF의 재정 문제로 인해 라이벌 팀인 AIK 포트볼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1,000 크로나 (약 70 파운드 스털링)와 카펫, 어머니를 위한 코트, 맞춤 정장이었다고 전해진다.[10][6][5] 이적 직후 잉글랜드에서 열린 친선 투어에 참가하여 조지 케이 리버풀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6] 그러나 1950년 봄에 스웨덴의 의무 병역을 수행했기 때문에 AIK에서의 공식 데뷔는 연기되었다.[4]

1950년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프레스렌스 라그"에서 뛰고 있는 스코글룬드


스코글룬드는 AIK에서 짧은 기간 동안 활약하면서 1950년 7월 24일 로순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1950 스벤스카 쿠펜 결승전에서 헬싱보리 IF를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0] 1950년 7월 30일, 알스벤스칸에서 AIK 소속으로 말뫼 FF와의 경기에 처음 출전했다.[10] 얼마 지나지 않아 홈 경기에서 열린 AC 밀란과의 친선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득점을 기록했다.[10] 이러한 활약으로 ''프레스렌스 라그''에 차출되어 1950년 5월 18일에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치렀고, 2골을 넣으며 푸테 코크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1950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다.[4]

1950-51 시즌, 스코글룬드는 AIK 소속으로 1950–51 알스벤스칸에서 단 5번의 경기에 출전했고, AIK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최상위 리그에서 강등되었다.[10]

2. 3. 인터 밀란

1950년 가을, 스코글룬드는 이탈리아의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했는데, 이적료는 1,200만 리라였다.[6] 그해 10월 밀라노에 도착하자, 그는 2,000명의 구단 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스코글룬드는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서 5-1로 승리하며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고, 몇 주 후 밀라노 더비에서 2골을 기록하며 AC 밀란을 3-2로 꺾었다.[4][5] 1951-52 시즌 동안 29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고, 인테르는 리그 선두에 승점 1점이 뒤진 채로 시즌을 마쳤다.[6]

이탈리아에서의 성공적인 시작 이후, 스코글룬드는 인테르 밀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고, 1952-53 시즌과 1953-54 시즌 세리에 A에서 우승했다. 1953-54 시즌 동안 스코글룬드는 이스반 네르스가 라이벌 AC 밀란과의 결정적인 우승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도록 3개의 어시스트를 제공했다.[12] 스코글룬드는 또한 인테르 밀란의 리그 우승 시즌 동안 공격수 베니토 로렌지 및 파스 윌크스와 좋은 파트너십을 맺었다.[13][5] 알프레도 포니 감독은 스웨덴 선수를 팀의 공격력의 핵심으로 활용하는 매우 수비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6]

포니는 1954-55 시즌 말에 인테르 밀란을 떠났고, 클럽과 스코글룬드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55년 말에 클럽은 안젤로 모라티에게 인수되었고, 그는 회장 재임 첫 3년 동안 7번의 감독 교체를 단행했다. 이 기간 동안 인테르 밀란은 세리에 A에서 어떠한 도전도 하지 못했다.[6]

스코글룬드는 클럽에서의 말년에 인테르 밀란에서 부활을 누렸다. 스웨덴에서 열린 1958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구단 경영진은 그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10,000 스웨덴 크로나의 보너스를 제공했다.[6]

스코글룬드는 인테르 밀란에서 총 246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하여 57골을 기록했다. 그는 29세의 나이로 1959년 여름에 클럽을 떠났다.[5]

스코글룬드(왼쪽)이 1951년 1월 7일 토리노와의 경기 전에 입장하는 모습. 그는 동료 스웨덴 선수 셸 로센 (오른쪽)과 마주했다.

2. 4. 삼프도리아와 팔레르모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1959-60 시즌을 앞두고 삼프도리아와 3천만 리라(1만 7250 파운드)에 계약했다.[6] 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6] 3시즌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며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2][5] 그러나 제노바를 연고로 하는 삼프도리아는 스코글룬드가 활약하는 동안 국내 타이틀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1962년 여름, 팔레르모와 계약했으나, 시칠리아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스코글룬드는 스타디오 델라 파보리타의 관중석 아래 다용도실에 배정되었고,[2] 도시에서 지루함과 좌절감을 느껴 이적을 모색했다.[5] 1962년 10월, 유벤투스에서 훈련하며 "그런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은 영광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테스트에서 구단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6] 결국 팔레르모로 복귀하여 시즌 동안 6경기 출전에 그쳤고, 1963년 7월 이탈리아와 세리에 A 경력을 마감했다.[6]

2. 5. 함마르뷔 복귀

1964년, 스코글룬드는 고향 팀 함마르뷔로 돌아와[10] 그해 팀의 알스벤스칸 승격을 이끌었다.[6] 1964년 5월 8일 요한네쇼브 IP에서 열린 칼스타드 BK와의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고, 코너킥으로 직접 골을 넣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6] 함마르뷔에서 그는 동생 카를-에베르트 스코글룬드와 함께 뛰며[15][16][17] 훌륭한 파트너십을 보여주었다. 굴드볼렌 수상자인 골키퍼 로니 헬스트룀은 스코글룬드에 대해 "나카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을 다루었다."라고 평가했다.[14]

1965년 함마르비에서 카를-에베르트 스코글룬드("야", 왼쪽)와 레나르트 스코글룬드("나카", 오른쪽) 형제, 6월 23일 외르그리테 IS와의 경기 후 촬영.


스코글룬드는 1967년 시즌을 끝으로 함마르뷔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며, 총 56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다.[3] 이후 아마추어 클럽인 케르토르프스 IK에서 잠시 뛰었다.[6]

3. 국가대표팀 경력

레나르트 스코글룬드는 1950년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역사에서 중요한 선수였다. 1950년 5월 8일 네덜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하여 4-1 승리를 이끌었다.[18][5] 한 달 후, 195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스웨덴 대표팀이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5] 스웨덴 축구 협회(Svenska Fotbollförbundet)의 정책에 따라 프로 선수들은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었지만,[6] 스코글룬드는 뛰어난 활약으로 "흔들리는 옥수수"라는 별명을 얻었다.[12]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스웨덴은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스코글룬드는 서독과의 준결승전에서 A매치 유일한 골을 기록하며 3-1 승리를 이끌었다.[3] 그는 좁은 각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3] 스코글룬드는 이 대회에서 최고의 왼쪽 윙어로 선정되었다.[3]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195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기간 동안 "나카"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닐스 리드홀름 주장, 군나르 그린과 아그네 시몬손도 함께 촬영되었다.


1964년까지 스웨덴 국가대표팀에서 총 11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30] 1964년 10월 폴란드와의 친선 경기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였다.[12][18]

국가대표팀별 출장 및 득점 (연도별)[30]
국가대표팀연도출장득점
스웨덴195040
195100
195200
195300
195400
195500
195600
195700
195861
195900
196000
196100
196200
196300
196410
합계111



레날트 스코글룬드의 국제 경기 득점 목록
No.날짜경기장상대스코어결과대회
1울레비, 예테보리, 스웨덴1–13–11958년 FIFA 월드컵[31]


4. 플레이 스타일

레나르트 스코글룬드는 뛰어난 볼 컨트롤, 훌륭한 왼발, 그리고 뛰어난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선수였다.[12] 젊은 시절 인사이드 레프트에서 성숙한 왼쪽 윙어로 성장하면서, 놀라운 개인 드리블 기술과 뛰어난 경기 운영 능력을 균형 있게 보여주었다.[12] 그는 또한 강력한 슛과 뛰어난 득점력을 갖추고 있었다.[14] 스코글룬드는 선수 경력 내내 세트피스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졌다.

1966년 Sandvikens IF와의 경기에서 코너킥을 하는 스코글룬드.


하지만, 때때로 이기적인 선수,[21] 혹은 "솔로 플레이어"로 여겨지기도 했다.[6] 그의 약점으로는 제한적인 신체 내구력, 기복, 그리고 지구력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21][12]

초창기 스코글룬드의 플레이 스타일은 스벤 리델과 헨리 "가르비스" 칼슨과 같은 스웨덴 국가대표팀 스타 선수들과 비교되기도 했다.[21][12]

5. 개인적인 삶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두 번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6] 첫 번째 부인 누치아 지렐리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 에베르트 스코글룬드와 조르지오는 모두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6][14] 에베르트는 인테르에서, 조르지오는 AC 밀란에서 뛰었다.[6] 스코글룬드는 결혼 외에도 두 아들을 더 두었는데, 1949년에 태어난 아들은 입양되었고 1959년에 태어난 페테르는 스웨덴에서 자랐다.[6]

1960년대 초 지렐리와 이혼한 후, 스코글룬드는 1963년 스웨덴으로 돌아오기 직전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6] 두 아들과 함께 피렌체로 가던 중 차량이 도로를 벗어나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가족은 지나가던 운전자들에 의해 구조되었다.[6]

스코글룬드는 프로 선수 시절 전기 기술자로 일했으며, 인테르 밀란에서 뛰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2] 친구와 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등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4][5] 아내와 함께 밀라노에 "바 나카"라는 레스토랑을 열기도 했지만, 적자로 인해 재정 고문에게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6]

스코글룬드는 돈이 필요할 때면 음악 경력을 쌓기도 했다.[6] 1958년 FIFA 월드컵에서의 성공 이후, 스티그 안데르손이 작사 및 제작한 "Vi hänger med"를 발표하여 스웨덴 차트 7위에 올랐다.[24] 여름 휴가 기간에는 스웨덴의 폴크파르크를 돌며 노래를 부르고, 그의 유명한 "두 번의 왕좌" 묘기를 선보였다.[21][5]

1964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후, 스코글룬드는 재정적,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6] 클럽 감독의 도움으로 카페트 판매원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평생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약물 남용 문제도 있었다.[14][6] 프란체스코 모리니에 따르면, 스코글룬드는 코너 플래그 옆에 작은 위스키 병을 보관하고 코너킥을 찰 때 술을 마시기도 했다.[6] 그의 음주는 여러 법적 문제를 야기했는데, 택시 기사와의 다툼으로 고소를 당하거나, 음주 운전으로 면허를 잃기도 했다.[6][21]

그의 형제들인 게오르그 "요제" 스코글룬드와 카를-에베르트 "야" 스코글룬드 역시 함마르뷔 IF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6] 그의 손자 지미 욀베스타드는 내셔널 하키 리그(NHL)에서, 알빈 스코글룬드는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하는 등 그의 후손 중 일부도 프로 운동선수가 되었다.

6. 은퇴 이후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은퇴 이후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2] 그는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고, 쇠데르말름의 작은 아파트에 주로 머물렀다.[12] 42세에 조기 은퇴한 후 사회 복지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다.[14]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을 치우는 일을 하기도 했다.[6]

스코글룬드는 평생 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았다.[14] 솔나에 있는 금주 단체인 란카르나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술을 끊으려는 그의 노력은 계속 실패했다.[12] 스코글룬드의 전 팀 동료 로니 헬스트룀은 그가 "자신감이 빠져나가면서" "엄청난 광장 공포증을 겪게 되었다"고 회고했다.[14]

1975년 7월 8일, 스코글룬드는 45세의 나이로 자택 부엌 바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14] 스톡홀름 남부의 스코그스치르코고르덴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약 2,000명이 참석했다.[6]

1984년, 카타리나 반가타에 있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밖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매년 12월 24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상에 모여 스코글룬드를 추모한다. 이 동상이 있는 광장은 "나카스 흐르나"(Nackas Hörnasv, 나카의 코너)라고 불린다.

나카스 흐르나 동상

7. 유산 및 평가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스웨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7] 1984년, 그의 어린 시절 집 앞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12] 동상이 있는 광장은 "나카스 흐르나"(Nackas Hörnasv, 나카의 코너)로 명명되었는데,[12] 이는 스코글룬드가 함마르뷔 복귀전에서 코너킥을 곧바로 골로 연결시킨 것을 기념한 것이다.[3]

스톡홀름 쇠데르말름의 "나카의 코너" 동상


매년 그의 생일인 12월 24일에는 수많은 팬들이 모여 그를 추모한다.[3] 주로 함마르뷔 서포터들이 그곳에 오지만, 스코글룬드의 플레이를 본 다른 클럽의 팬들도 찾아오곤 한다. 1958년, 스코글룬드는 스토라 그라바르스 마르케("빅 보이 배지")를 받았다.[25] 2004년 함마르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었고,[26] 2006년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7] 2017년, 스코글룬드는 스톡홀름 축구 협회와 스베리에스 라디오가 실시한 투표에서 지난 세기 스톡홀름 출신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28]

8. 수상 내역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AIK에서 뛰며 1950년 스벤스카 쿠펜 우승을 경험했다.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인테르 밀란에서 활약하며 세리에 A에서 1952-53 시즌과 1953-54 시즌, 두 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스웨덴 컵에서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FIFA 월드컵에서는 1958년 준우승, 1950년 3위를 기록했다.

8. 1. AIK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AIK에서 뛰며 1950년 스벤스카 쿠펜 우승을 경험했다.

8. 2. 인터 밀란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인테르 밀란에서 활약하며 세리에 A에서 1952-53 시즌과 1953-54 시즌, 두 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8. 3. 스웨덴

레날트 스코글룬드는 스웨덴 컵에서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FIFA 월드컵에서는 1958년 준우승, 1950년 3위를 기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Lennart Nacka Skoglund http://www.borjedorc[...] Borjedorch.se 2014-03-12
[2] 웹사이트 Historien om bollgeniet – som slutade i tragedi http://www.aftonblad[...] Aftonbladet 2005-07-09
[3] 웹사이트 Lennart "Nacka" Skoglund http://borjedorch.se[...] Börje Dorch 2017-04-14
[4] 웹사이트 Lennart "Nacka" Skoglund http://www.stockholm[...] Stockholms idrottsförbund 2016-06-07
[5] 웹사이트 Nacka - myten och människan https://www.oppetark[...] Sveriges Television 1987-01-28
[6] 웹사이트 Lennart Skoglund: Whisky blues http://espnfc.com/co[...] ESPN 2012-09-06
[7] 웹사이트 Historia http://www.hammarbyf[...] 2017-09-12
[8] 웹사이트 Ya – en av bröderna Skoglund http://www.hifhistor[...] hifhistoria.se 1999-01-01
[9] 서적 Södermalm: [berättelser, bilder och sånger om en skön stadsdel] Kvadraten 1986-01-01
[10] 웹사이트 Lennart "Nacka" Skoglund - från AIK och ut i världen http://www.aik.se/fo[...] Aik.se 2006-01-01
[11] 간행물 Sucesso e debandada Max Gehringer, ''Especial Placar: A Saga da Jules Rimet'' fascículo 4 – 1950 Brasil, November 2005, Editora Abril 2005-11-01
[12] 웹사이트 K Lennart 'Nacka' Skoglund https://sok.riksarki[...] Riksarkivet 2017-04-14
[13] 웹사이트 Il padre faceva impazzire i difensori http://www.magliaros[...] La Gazzetta dello Sport illustrata 1978-01-01
[14] 웹사이트 Nacka Skoglund – från firad till fallen stjärna https://www.land.se/[...] Land 2016-12-27
[15] 웹사이트 Ya – en av bröderna Skoglund http://hifhistoria.s[...] Hammarby Fotboll 2020-11-10
[16] 웹사이트 "Ya" avstod från Italien – men inte från Skövde http://hifhistoria.s[...] Bolletinen 2020-11-10
[17] 웹사이트 "Arvtagaren" deltog i hyllningen av "Nacka" Skoglund på julafton https://www.dn.se/bl[...] Dagens Nyheter 2020-11-10
[18] 웹사이트 Landslagsdatabasen: Lennart Skoglund https://svenskfotbol[...] 2017-04-14
[19] 서적 "Nacka" och drömmen om det goda livet Norstedts 1986-01-01
[20] 웹사이트 Allt om fotbolls-VM http://www.sverigesl[...] 2017-04-14
[21] 웹사이트 Nacka Skoglund gjorde succédebut mot Degerfors IF våren 1947 http://www.degerfors[...] 2017-04-14
[22] 웹사이트 "De hånade min farfar" http://www.expressen[...] 2017-04-14
[23] 웹사이트 Albin Skoglund – årets sommarproffs! http://bkhacken.se/a[...] 2017-04-14
[24] 웹사이트 De svenska fotbollslåtarna vi älskar och avskyr http://www.sydsvensk[...] 2017-04-14
[25] 웹사이트 Stora Grabbar (-2016) https://svenskfotbol[...] SVFF 2017-04-16
[26] 웹사이트 Historik http://www.hammarbyf[...] Hammarby Fotboll 2017-04-16
[27] 웹사이트 Skoglund, Lennart "Nacka" https://svenskfotbol[...] SVFF 2017-04-16
[28] 웹사이트 Vickan och Nacka århundradets spelare i Stockholm https://svenskfotbol[...] SvFF 2017-05-23
[29] 웹사이트 Inter legender - nr. 2 http://www.svenskafa[...] SvenskaFans 2017-04-16
[30] 웹사이트 Lennart Skoglund - Spelarstatistik - Svensk fotboll https://www.svenskfo[...] 2021-02-08
[31] 웹사이트 Sverige - Tyskland - Matchfakta - Svensk fotboll https://www.svenskfo[...] 2021-02-08
[32] URL http://espnfc.com/c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